2026 · 5·18 광주민중항쟁
2026년 우리는
왜, 80년 광주를
얘기하는가
보건의료노조 서울지역본부 · 국립중앙의료원지부 대의원 교육
당신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 광주사태
- 광주민주화운동
- 5·18민주화운동
- 5·18민중항쟁
같은 사건, 네 개의 이름
이름은 그냥 바뀌지 않았다
- 1980
- 광주사태 — 신군부가 붙인 이름. 계엄사 발표와 모든 언론이 사용
- 1988. 3. 24.
- 광주민주화운동 — 노태우 정부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규정
- 1988
- 국회 광주특위 — 야당 ‘민주화투쟁’ 주장, 여당 반대 → ‘운동’으로 타협
- 1995. 12.
-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 공식 명칭 확정
- 1997
- 5월 18일 법정기념일 지정
- 2026
- 헌법 전문 수록 논의 — 여기서도 ‘어떤 이름으로’가 쟁점
‘투쟁’이라는 두 글자를
끝내 넣지 못했다
투쟁이라고 하면 “누구랑 싸웠는데?”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그 질문을 막으려고 ‘운동’이 되었다.
제주 4·3의 공식 명칭은
‘제주4·3사건’입니다. ‘사건’이요.
국가가 자기가 저지른 일에 이름을 붙일 때,
그 이름은 가장 책임이 덜 드러나는 쪽으로 정해진다.
그래서 왜 ‘민중항쟁’인가
- ‘운동’과 ‘항쟁’은 다르다. 총을 든 군대가 도시에 들어왔고, 시민이 총을 들고 맞섰다. 그건 운동이 아니다.
- ‘항쟁’에는 상대가 있다.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면 누가 죽였는지가 문장에서 사라진다.
- ‘민중’은 주체를 밝힌다. 구두 수선공, 식당 종업원, 운전기사, 공장 노동자, 재수생, 중학생.
- 이름이 깎인 역사가 있다. 지금의 공식 명칭은 유가족이 아니라 당시 여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정해졌다.
초를 꽂는 자리가
열두 개여야 하는데
열 개입니다
오늘 90분 동안 할 이야기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촛대가 열 개인가.
1부 왜 1980년이었나
1961. 5. 16.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나와 정권을 잡는다.
1972. 10. 17. 유신
국민이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없앤 헌법. 체육관에 사람을 모아 놓고 대통령을 뽑는다. 죽을 때까지.
1979. 8. YH무역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1979. 8. 11. 새벽 2시 · ‘101호 작전’
경찰 1,200명 · 23분
그 23분 사이에 스물한 살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신민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 시멘트 바닥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된다.
국가가 사람을 죽이면
이런 순서로 진행된다
- 경찰은 자살이라고 발표한다. “손목에 동맥을 그은 자국이 있다”
- 부검 결과는 추락사였다. 후두부 골절, 허리뼈·엉덩이뼈 골절
-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타살로 규명한다. 29년이 걸렸다
그리고 아홉 달 뒤 광주에서, 똑같은 순서가 훨씬 큰 규모로 반복된다.
1979. 12. 12. — 암호명 ‘생일집 잔치’
12·12로 군대를 잡은 자들이
5·18로 나라를 잡는다
1980. 5. 15. 서울역 · 10만 명
그리고 그날 저녁,
스스로 흩어졌다
피를 막은 현명한 후퇴였을까,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었을까
답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질문을 끝까지 들고 가 주십시오.
우리는 언제 물러서고 언제 버티는가.
1980. 5. 17. 밤 — 비상계엄 전국 확대
지도만 넓어진 것이 아니다
- 지휘권이 넘어간다. 계엄사령관이 전국의 행정과 사법을 통째로 지휘한다.
- 계엄포고 10호. 정치활동 금지 · 언론 출판 방송 사전검열 · 대학 휴교 · 집회 금지
- 그날 밤 잡아간다. 김대중·문익환은 ‘소요 조종’, 각 대학 학생회 간부들도.
말할 사람 · 모일 자리 · 실을 지면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래서 아무도 몰랐다. 이것이 광주가 고립된 이유다.
1980. 5. 18. 아침 · 전남대 정문
“휴교령이 내려지면
다음 날 아침 열 시,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자”
휴대폰이 없던 시절. 학교가 닫히면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다.
연락이 끊길 것을 미리 알고, 끊긴 뒤에 만날 자리를 정해 둔 약속이었다.
1980. 5. 18.
“거리에 나와 있는
모두를 체포하라”
시위대를 체포하라가 아니다.
장 보러 나온 사람, 출근하던 사람, 버스 기다리던 사람.
시위 진압이 아니라 도시를 상대로 한 작전이었다.
최초의 희생자 · 김경철
공수부대가 뭐라고 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귀머거리 흉내 내지 마라, 반항하는 거냐” — 집에는 백일 된 딸이 있었다.
마이신 때문에 농아가 된 거야. 나 때문에.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던 경철이가 왜 맞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간 게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후회스러워.” — 김경철의 어머니. 아들을 국가가 때려죽였는데, 어머니가 자기를 탓하고 있다.
“계엄군이 죽였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가해자가 자기 손으로 쓴
내부 문서에 적혀 있다
- 1980년 6월 보안사령부 작성 〈광주사태 검시참여 보고〉
- 김경철의 사망 경위 = ‘계엄군’
- 당시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됨
- 보안사령부 =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곳. 광주를 ‘폭도들의 소요’로 발표하던 바로 그 조직
증거가 없어서 논쟁이 되는 게 아니다. 증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총에 대검이 꽂혀 있다
시위 진압에 대검을 꽂지 않는다. 대검은 사람을 찌르는 물건이다.
1980. 5. 20. 저녁 · 금남로
택시와 버스가 줄지어 나왔다
학생의 싸움이 시민 전체의 싸움으로 넘어간 순간.
그 전환을 만든 것이 운수노동자들이었다.
1980. 5. 20. 광주역 — 그날 집을 나선 이유
아들 졸업증명서를
떼러 나갔다가
삼촌 가게 문을
잠갔는지 확인하러
광주역 광장에서
총상
종업원이 안 보여서
찾으러 나갔다가
광주역에서
총상
졸업증명서, 가게 문단속, 없어진 종업원 찾기.
시위하러 나간 사람이 이 명단에 없다.
1980. 5. 21. 낮 1시 · 전남도청 앞
애국가가 흐르는 동안
조준사격이 시작됐다
시민이 총을 들어서
군대가 쏜 것이 아니다
군대가 쏘고 나서, 시민이 총을 들었다.
신군부의 해명 — “자위권 발동”
전일빌딩 10층 천장에서
탄흔 245개
땅에서 쏜 총이 10층 천장에 박힐 수 없다. 헬기에서 쏜 것이다.
5·18 희생자 셋 중 한 명은 미성년이었다
그것도 벗겨진 신발을 주울라고 돌아선 그 어린 것한테까지
무자비하게 총을 갈겨대야 했습니까?
그놈들 행동은 순 장난이었제. 어찌 그게 군인들이 할 짓이요?
온 마을에 탄피가 깔릴 정도였당께요.” — 송암동에서 죽은 전재수(11세)의 어머니. 아들을 보내고 밥을 못 드시다 1984년에 돌아가셨다.
나치 독일 돌격대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여성, 어린이, 노인 등을 포함한
비무장 시민을 무참히 살육했다.” — 놈 촘스키,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1993) · 국제인권단체 아시아워치 조사 보고 인용
‘나치 돌격대’ — 유럽에서 이 말의 무게
Sturmabteilung (SA) · 갈색 셔츠
- 국가의 군대가 아니었다. 나치당이라는 정당이 거느린 사병 조직
- 전쟁이 아니라 거리의 폭력. 반대 정당 집회를 부수고, 노동조합원을 패고, 유대인을 습격했다 — 적군이 아니라 자기 나라 시민을 상대로
- 민주주의를 안에서 무너뜨린 도구. 바이마르 공화국은 선거로만 무너진 게 아니다. 거리에서 반대파를 두들겨 패서 무너졌다
“진압하다 과했던 군대”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잡기 위해
자기 나라 시민을 상대로
테러를 수행한 집단
유럽의 언어에서 이보다 강한 규정은 거의 없다.
그리고 1934년 · ‘장검의 밤’
나치 돌격대는
히틀러 손에 숙청당한다
권력을 잡는 데 다 쓰고 나니까 정리한 것이다.
폭력으로 권력을 잡은 자는, 그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도 결국 버린다.
1980. 5. 27. 새벽 · 전남도청 · 윤상원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 서울 주택은행
6개월 만에 그만두고 광주로 돌아왔다
노동자들과 야학을 하려고. 들불야학.
21살 여성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30살 노동운동가 윤상원의 죽음으로 닫힌다.
왜 하필 광주였을까
광주가 특별히 용감해서가 아니다
준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내내 야학이 있었고, 노동자 모임이 있었고, 농민회가 있었고, 문화패가 있었다.
그래서 계엄군이 들어왔을 때 누가 어디로 연락하고, 누가 유인물을 만들고, 누가 시신을 수습할지가 며칠 만에 돌아갔다.
조직이 있는 곳은 버틴다. 없는 곳은 흩어진다.
2부 그때 병원은 무엇이었나
1980. 5. 21. 집단발포 직후
피가 떨어졌다
광주적십자병원 헌혈차가 시내를 돌기 시작한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도시에서 확성기로 “피가 부족합니다” 외치며.
학생, 주부, 상인. 그리고 기록에는 이렇게 남아 있다.
인근 유흥업소 종업원들까지 줄을 섰다.
총 맞은 사람을 살리려고
총 맞을 각오를 하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
박금희 · 열여덟 · 춘태여상(현 전남여상) 3학년
헌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계엄군의 총에 맞았다
5월 21일, 헌혈 호소 방송을 듣고 광주기독병원을 찾아갔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헌혈버스에서 총격을 받은 것으로 판단했다.
사람을 살리러 다니던 그 차를 향해 쏜 것이다.
최미애 · 스물다섯 · 임신 8개월
남편을 기다리다
머리에 총을 맞았다
어머니가 쓰러진 딸을 집으로 옮겨 배를 만져 보니 뱃속의 아이는 아직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길가에서 남편 기다리던 임산부다
시위대도 아니고, 무장도 안 했고,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 ‘진압’이라는 말은 더 이상 쓸 수 없다.
구 광주적십자병원 · 5·18 사적지 제11호
병원이 사적지가 되었다
사적지라고 하면 싸운 곳, 죽은 곳을 떠올린다. 도청, 금남로, 전남대 정문.
기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5·18 당시 시민들의 공동체 정신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공간 가운데 하나.”
광주가 열흘을 버틴 힘 중 하나가
“다치면 저기로 가면 된다”는 믿음이었다.
1980년 5월 21일
열여덟 살 박금희가
헌혈차에 오르며 한 선택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공공의료는 평시에는 적자로 계산되지만
그런 날에는 그 도시의 마지막 방어선이 된다
1980년 광주에서 다른 게 다 멈췄을 때 문을 열고 있던 곳이 병원이다.
2020년 코로나 때 아무도 환자를 안 받으려 할 때 먼저 병상을 비운 곳이 국립중앙의료원이다.
그 방어선을 지키는 건 건물이 아니라, 거기서 “나는 여기 있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이다.
3부 누가 책임졌고, 누가 안 졌나
1980. 5. 30. 김의기 · 5. 하순 김종태
광주 밖에서
죽은 사람들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수백, 수천 명이 죽어가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1996년 · 12·12 및 5·18 재판
대통령을 두 명 지낸 사람들이
수의를 입고 섰다
| 1심 선고 | 그 뒤 | |
|---|---|---|
| 전두환 | 사형 · 추징금 2,296억 | 1997.12 특별사면 |
| 노태우 | 무기징역 · 추징금 2,205억 | 1997.12 특별사면 |
| 정호용 · 황영시 등 | 징역 22.5년 / 17년 / 10년 / 8년 | 전원 사면 |
감옥에서 죽은 사람은 없다. 전두환은 2년 정도 살고 나왔고,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 했고,
추징금을 다 내지 않은 채 2021년에 사과 한마디 없이 죽었다.
학살의 책임자를 법정에 세우는 데까지는 갔지만
그 책임을 끝까지 묻지는 못한 나라
1980. 5. 22. 백악관 상황실 — 집단발포 바로 다음 날
국무부 · 국방부 · CIA · 합참 · NSC 최고위급이 모여
최종 무력진압을 승인했다
- 당시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었다
- 미국은 북한군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 이 회의에서 한국의 실권자를 최규하가 아니라 전두환으로 보고 있었다
2026 · 46년 만에
미국 기밀문서가 해제됐다
주한 미국대사도, CIA도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은 내부 봉기’로 판단하고 있었다.
“광주에 북한 특수군 600명이 내려왔다”는 주장에 대해,
미국 정보기관의 내부 보고서가 아니라고 말해 준 것이다.
국내 문서는 ‘광주사태’, CIA 문서는 ‘Gwangju Riot’. — 부르는 쪽의 입장이 이름에 그대로 들어간다.
1905년에도, 1945년에도, 1980년에도
계산은 같았다
한반도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 —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우리에게 묻지 않았다.
4부 왜 아직 안 끝났나
도청 앞에 앉아 있던 시민들의 얼굴에
번호가 붙었다
이 사람들이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군이라는 주장.
총 맞아 죽은 사람이 40년 뒤에 “너는 사실 간첩이었다”는 말을 듣는다.
‘빨갱이’ 한마디면
그 사람의 말과 삶을 통째로 없앨 수 있었다
1980년 신군부가 쓴 말이 정확히 이것이다. “불순분자, 폭도, 북한의 사주.”
그 말이 통했기 때문에 다른 도시가 침묵했다.
2024. 12. 3. 밤
44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군인들이 국회로 들어갔다. 헬기가 국회 마당에 내렸다.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그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시작되려고 했다.
1980년 광주
고립됐다.
아무도 몰랐고, 알아도 못 왔고,
열흘 뒤에 혼자 진압당했다.
2024년 서울
고립되지 않았다.
몇 시간 만에 사람들이 모였고,
생중계가 됐고, 그날 밤에 계엄이 풀렸다.
그 차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계엄군이 시민을 쏘면 어떻게 되는가”를 온 국민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광주를 기억하는 일이
2024년 12월에
실제로 사람을 살렸다
2026년 8월 현재
| 옛 전남도청 복원 | 완료 — 2026.5.18 정식 개관 |
| 미국 기밀문서 | 진전 — ‘북한군 개입 없음’ 확인 |
| 12·3 계엄 처벌 | 진행 중 — 1심 무기징역, 항소심 |
|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 미완 — 2026.5.7 정족수 미달로 무산 |
| 발포명령자 규명 | 미완 — 46년째 |
| 암매장 · 행방불명자 | 미완 — 유족은 아직 장례를 못 치렀다 |
아직 광주민중항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호가 아니라 방금 본 표의 요약입니다.
이제 이 열흘을
뭐라고 부르시겠습니까?
- 광주사태
- 광주민주화운동
- 5·18민주화운동
- 5·18민중항쟁
비어 있는 두 자리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의 이름
아직 찾지 못한 시신들
헌법에 못 들어간 한 줄
열두 개가 다 채워지는 날, 그날이 5·18이 끝나는 날입니다. 아직 아닙니다.
1982. 2. 20. 광주 망월동
죽은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
박기순
전남대 학생.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가 들불야학을 만들었다.
1978년 12월, 연탄가스 중독으로 스물둘에.
윤상원
같은 야학에서 일하던 시민군 대변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그 결혼식에 바치려고 만든 노래
백기완의 시에서 가사가 왔고, 황석영과 김종률을 비롯한
광주 노래패 열다섯 명이 노래극 《넋풀이 — 빛의 결혼식》에 넣었다.
그때는 이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범죄였다.
몰래 녹음해 카세트테이프로 만들었고, 복사하고 또 복사해 전국으로 퍼졌다.
방송에 나온 적도, 음반으로 팔린 적도 없는데 몇 년 만에 전국이 알게 됐다.
왜 지금도 집회를 이 노래로 시작하는가
-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말을 거는 노래다. “산 자여 따르라” — 감상이 아니라 호명이다
- ‘임’은 애인이 아니다. 뜻을 같이한 사람, 먼저 간 동지를 말한다
- 부르는 것 자체가 저항이던 시간이 길었다. 집회 첫 순서로 이 노래를 부른다는 건 “우리는 그 사람들 뒤에 서 있다”고 확인하는 절차다
- 아직도 다투는 노래다. 2009년부터 정부가 기념식 제창을 식순에서 뺐고, 2017년에야 제창으로 돌아왔다
노래 하나 다 같이 부르는 걸
국가가 8년 동안 막았다
왜 막았겠습니까.
그 노래가 무엇을 기억하게 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노래는 홍콩에서, 미얀마에서, 태국에서 각자의 말로 번역돼 불린다.
1982년 망월동 묘지에서 몰래 녹음한 노래가 그렇게 됐다.
산 자여 따르라
이 노래를 부르실 때, 박기순과 윤상원 두 사람이 떠오르셨으면 합니다.